지난 2월 두번째 목장모임에서는 캘빈주의의 핵심적 교의를 상징하는 5가지 요체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머릿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 묘사되기도 하는데 그 각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의 설명은 두서 없이 쓴 저의 부족한 소견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므로 오류가 있으면 적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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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otal depravity:  
전적타락설이라고 주로 번역되는데, 인간이 원죄를 범한 후에는 본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자신에게 유익되는 일을 추구할 뿐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적타락이라는 강렬한 언어적 이미지가 거부감을 자아 낼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사람이 사악할대로 사악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 안에는 선함이 있을 수 있으되 그것이 자아라고 하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에고이즘에 가려 스스로의 힘으로는 참으로 선함을 회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적 무능력설 (total inability)라고도 합니다컵 안에 담긴 물은 그 자체로 깨끗하지만 한 방울의 독이 첨가되는 순간 대부분 물의 성분이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컵의 물의 본성은 전적으로 해악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선함은 에고에 갇혀 자아의 이익을 추구함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부터, 그 긍휼함과 은혜로움으로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아의 실현이라는 본성적 지향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사람이 타락한 존재라고 규정함은 본질적으로 타당한 명언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도 많은 구절들이 인간의 타락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8:1, 7:21, 3:19) 특히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3:10);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8:10). 그렇다면 인간은 선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선하지 않고 쾌락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왜 나쁜 것인가? 이 문제는 사실 종교와 현대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되물음이고 신앙의 정수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듯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좇아 절대 선을 추구함이 당연한 일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해 놓고 우리는 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2)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적적 선택이라고 번역되어 왔습니다. 우리 안에 깃든 가치나 우리의 행위라는 3차원적인 조건과는 하등 무관하게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정하신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외치고 자아에 도취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일견 불합리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입안을 수긍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연장선에서 도출될 수 있는 명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에고가 가득찬 인간들에게 있어서 그 낫고 못함이란 백지 한 장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건으로 구원하실 백성을 택하시는가? 그것도 어떻게 하여 태초부터 미리 예정지어 선택하심이 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신앙의 큰 신비에 해당하는 문제로서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언어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이른바 차원의 문제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3차원의 존재가 아닌 것이며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이라는 계통에 속해 있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신비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며 마치 2차원적 개미에게 어느 날 갑자기 과자 한 덩이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도 무조건적 선택을 가리키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 15:16). 바울의 서신에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 1:4);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에베소 1:11).

 

(3) Limited Attonement:
제한적 속죄라고 합니다. 앞의 두 명언의 연장선에 서서 봅니다. 에고와 독선에 가득하여 그 자신의 육신적 본성으로는 구원의 신비를 알 수 없는 인간들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미 택정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그 중 제한적인 일부만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 지성으로써 논리적으로 명쾌히 규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신앙의 신비 중 깊은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성경 구절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어리석은 양떼들이지만 그 중 그리스도에게 속한 무리가 있고 그렇지 않고 다른 목동에게 속한 무리가 있다는 말씀으로써 분명히 무리가 구분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장 14절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자신의 양 무리를 위함임을 명정하여 놓고 있으며, 26절도,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여 분명히 자신의 양에게 영생을 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양무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들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고 또 심판함은 불합리하다고 말하여 많은 무신론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모토로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또한 아무리 뛰어난 천재 과학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지 못함을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하겠습니다. 오히려 과학사상 아인슈타인보다 더욱 뛰어난 학자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뉴턴은 평생을 하나님의 신비를 연구하는 데에 바쳤습니다.

 

(4) Irresista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인간은 완고하고 에고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미로운 은혜를 베풀어 완악한 인간의 마음을 풀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그레이스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이 귀를 파고 들 듯 부드라운 미풍이 귓전을 스치듯 싱그러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채우듯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불가항력적입니다. 그것은 폭력적인 과정이 아니요 강압적인 절차도 아닙니다. 방과 후 아이가 부모를 만나듯 달콤한 ‘저항할 수 없는 끌어당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도 이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6:37-39).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6:44-4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5).

 

(5) Perseverance of saints:
성도의 견인이라 번역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감미로운 역사함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더욱 성숙해지고 종래는 영화롭게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성도들의 이끌림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5)라 하여 그것이 벅차고 생명력에 가득한 과정일 것임을 시사하고 있으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4)라 하여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9);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5-39) 라고 하여 칭의로부터 영화로 나아갈 것임을 명정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날들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한 주일도 건강한 모습으로 보내시고 금요일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