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두번째 목장모임에서는 캘빈주의의 핵심적 교의를 상징하는 5가지 요체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머릿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 묘사되기도 하는데 그 각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의 설명은 두서 없이 쓴 저의 부족한 소견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므로 오류가 있으면 적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1) Total depravity:
(2)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적적 선택이라고 번역되어 왔습니다. 우리 안에 깃든 가치나 우리의 행위라는 3차원적인 조건과는 하등 무관하게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정하신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외치고 자아에 도취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일견 불합리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입안을 수긍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연장선에서 도출될 수 있는 명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에고가 가득찬 인간들에게 있어서 그 낫고 못함이란 백지 한 장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건으로 구원하실 백성을 택하시는가? 그것도 어떻게 하여 태초부터 미리 예정지어 선택하심이 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신앙의 큰 신비에 해당하는 문제로서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언어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이른바 ‘차원의 문제’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3차원의 존재가 아닌 것이며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이라는 계통에 속해 있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신비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며 마치 2차원적 개미에게 어느 날 갑자기 과자 한 덩이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도 무조건적 선택을 가리키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요
(3) Limited Attonement:
제한적 속죄라고 합니다. 앞의 두 명언의 연장선에 서서 봅니다. 에고와 독선에 가득하여 그 자신의 육신적 본성으로는 구원의 신비를 알 수 없는 인간들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미 택정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그 중 제한적인 일부만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 지성으로써 논리적으로 명쾌히 규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신앙의 신비 중 깊은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성경 구절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즉, 어리석은 양떼들이지만 그 중 그리스도에게 속한 무리가 있고 그렇지 않고 다른 목동에게 속한 무리가 있다는 말씀으로써 분명히 무리가 구분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장 14절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자신의 양 무리를 위함임을 명정하여 놓고 있으며, 동 26절도,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여 분명히 자신의 양에게 영생을 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양무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들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고 또 심판함은 불합리하다고 말하여 많은 무신론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모토로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또한 아무리 뛰어난 천재 과학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지 못함을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하겠습니다. 오히려 과학사상 아인슈타인보다 더욱 뛰어난 학자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뉴턴은 평생을 하나님의 신비를 연구하는 데에 바쳤습니다.
(4) Irresista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인간은 완고하고 에고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미로운 은혜를 베풀어 완악한 인간의 마음을 풀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그레이스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이 귀를 파고 들 듯 부드라운 미풍이 귓전을 스치듯 싱그러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채우듯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불가항력적입니다. 그것은 폭력적인 과정이 아니요 강압적인 절차도 아닙니다. 방과 후 아이가 부모를 만나듯 달콤한 ‘저항할 수 없는’ 끌어당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도 이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5) Perseverance of saints:
성도의 견인이라 번역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감미로운 역사함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더욱 성숙해지고 종래는 영화롭게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성도들의 이끌림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날들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한 주일도 건강한 모습으로 보내시고 금요일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http://www.woorichurch.org/bwoori/tv/index.asp?sub_page=Y&menu=32&idx=21588 (이 링크를 따라 가서 '성경과학세미나 - 왜 창조인가'에 있는 1시간 30분짜리 wvm 영상보기 비디오 파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유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