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느 트로크메 '초기 기독교의 형성' Note(2)















초기 기독교의 형성 ,에티엔느 트로크메 지음, 유상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3


9. 60년대의 큰 위기

...일련의 극적인 사건들이 이러한 잘 짜인 구도(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매우 견고하게 조직된 집단)를 흔들어 놓게 된다. 같은 시기에 기존 질서에 항거하던 바울이 무력하게 되고, 이어서 죽임을 당하게 되자 이런 구도가 오히려 강화도리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첫번째 사건은 62년 이 모든 구도의 정점에 있던 야고보가 살해된 일이다. ...예수와 매우 가까웠고 경건하다는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 수장이라는 사실에 상당부분 권위의 기반을 두고 있었던 교회로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p146~7)

66년 이래 유대 팔레스타인은 반로마 항쟁과 이 항쟁이 초래한 가혹한 탄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며, 이는 결국 ...70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로 이어졌다. 이 비극적 사건으로 인하여 열심당이 점차 세력을 넓히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내부에는 큰 소동과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다.(p148)

야고보의 죽음, 그의 후계를 둘러싼 파동, 유대 전쟁과 그 이후의 대혼란-예를 들면 더 이상 순례여행을 못하게 된 일-등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최고 권위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기독교 교회는 준교황체제로부터 과도기 없이, 지역 교회와, 그리고 이들 지역 교회들이 스스로 설정한 교회 사이의 관계에 기초를 둔 회중교회 체제로 옮겨간 것이다.(p150)

네로에 의한 로마의 기독교인 박해가 있은 후 기독교와 로마 제국 사이의 관계에 있어 변한 것은 제국 당국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구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은 점차 합법종교로서의 유대교의 지위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진압권을 휘두르는 경찰과 행정 당국의 자의성에 내맡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64년의 박해가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거나, 기독교인들이 3세기 초 이전에 조직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고 짐작케 하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오랫동안, 여전히 어느 정도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지역적 박해가 있었을 뿐이다. ...기독교라는 작은 그룹이 받은 타격은 유대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전이 파괴됨으로 인해 속죄제사와 순례여행이 중지되었고, 이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대란에 비교될 수 있는 재앙이었다. 유대교라는 종교의 균형이 문제시되었고, 궁극적으로 회당이 산산히 부서져 흩어질 위험이 현실화된 것이다. ...성전을 박탈당한 유대교를 위협하던 해체의 위험은 예루살렘의 나리많은 바리새파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의 주도에 힘입어 매우 신속하게 극복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사십여킬로미터 떨어진 연안의 평지에 위치한 얌니아에 학교를 세우도록 허락받는다. 그의 학교는 대성공을 거두게 도니다. 그는 얼마 후 새로운 산헤드린을 설립하고, 절기를 정하는 등의 문제에서 전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보유했던 일부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유대교에 종교적 구심점을 부여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통로를 통해 여러 회당에게 제안된 것은 바리새파의 사상이었다.  ...유대교의 다른 종파들은 유대교는 유대 전쟁에 의해 소멸되었으므로 유대교는 도처에서 바리새적 형태를 띠게 된다. ...1세기말 얌니아의 산헤드린을 이끌던 원로 가말리엘2세는 유대교 전체를 대표하는 의회를 소집하여 정경에 포함되는 책의 목록을 정하고, 회당에서 열여덟 개의 축복기원문 중 열두 번째 기도에 배교자를-아마도 나사렛 추종자도-저주하는 문장을 추가하게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회당에 소속되어 있던 기독교인들은 회당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회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에서나 디아스포라에게서나 70년대 이전의 풍부한 다양성은 정통이라고 불릴 것들을 위해서 신속히 배제되어야 했다. (152~154)


10.기독교의 반격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맞서던 대다수 유대인들의 힘은 약화되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의식하고, 그때까지 복음을 거부하던 그들이 이제는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확신이 ㅅ아당부분 흔들린 틈을 이용하여, 그때까지 극복할 수 없었던 장애물을 둘러가기 위해 다소 새로운 용어로 자신들의 신앙을 제시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야고보서는 문제에 접근하는 첫번째 양상을 보여준다. /...이 글은 편지라기보다, 무세 율법에 대한 신실함과 경건함으로 잘 알려진 인물인 야고보의 권위를 내세우는 기독교인 저자가 유대 기독교인을 포함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체에게 보내는 일종의 회람이다. /... 야고보서의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읽은 적도 없는 바울의 서간이 아니라 바울의 메시지를 계승하는 교회들의 실천적 행동이 외부에 있는 저자에게 비친 모습이다. 저자가 보기에 회당과 단절되고 모세 율법으로부터도 완전히 이탈한 이 교회들은,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생활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설정하지 않는 신비 종교와 그리스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비판은 적어도 몇몇몇 교회에게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p158~160)

마태복음서는 얌니아 학파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회당들을 기독교의 메시지에 가담시키려 했던 기독교 주류의 호전성에 관하여 또 다른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 문서가 목표로 삼는 대상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이미 받아들였든지, 아니면 거부하는 사람들이든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체이다. 쓰여진 시기는 일반적으로 90~95년경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회당의 상당수 신자들을 , 특히 새로운 정통 교리에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p162~3)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바리새파의 개혁에 가담했는데, 이는 기독교의 반격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세기 말경 기독교는 수만 명 정도의 신자들을 규합하는 소규모 운동이었다. 반면 유대교는 대 참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백만의 신자를 헤아렸으며, 그들은 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선 너머뿐아니라 제국 내에서도 존재했다. 로마 제국 내에서 유대인의 지위가 주는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작은 기독교 집단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난국을 타개할 구원은 그 안에서도 보잘 것 없는 소수파였던 바울의 상속자들로부터 오게 된다.(p165)

11. 바울 후예들의 소생

70년대 중반 유대교가 큰 타격을 받고 나서 회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기독교인들이, 어찌할 바 모르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끌어들이려 하자, 바울의 상속자들은 더더욱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었다.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부인해야 하는 위험한 형제들이었다. ...80년대 초부터 바울이 세운 교회들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는 처음에는 희미했으나 점점 대담해져갔다. 80~85년경에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누가복음서와 사도생전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심성있는 목소리이다.(p168)

한 구석에 일종의 열등감이 묻어 있는 이러한 처음 시도는 한층 과감한 다른 시도로 이어지게 된다. 85~90년경 , 바리새파의 개혁이 진전되고 기독교인들이 회당으로부터 축출당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충고와 실천적 사례들을 통해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의 조직 결성을 도울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서간들-디모데전후서 및 디도서-은 이렇게 해서 태어나게 된다. ...마침내 다시 가까이 해도 좋을 인물이 된 바울의 이름으로 된 목회적 충고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아직 제대로 조직을 갖추지 못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바울은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전달해야 했다.(p171)

...동시대인 85~90년경에 쓰여진 에베소서는 더 멀리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바울 사상의 연장선에서 보다 더 기본적인 교회론을 제안하려 노력했다. / 목회서신과는 다르게 사역자들에 관한 문제는 그저 지나치면서 언급되어 있을 뿐이고, 모든 강조점은 교인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에 주어졌다. 이 모든 것이 바울의 사상과 가깝기는 하지만, 보편 교회가 강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 교회 생활을 강조한 바울과 구별된다. ...바울의 상속자들이 1세기말 기독교의 삶에 완전한 기여를 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단계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바울 자신이 쓴 텍스트들을 읽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에게 있어 그들의 스승은 분파주의자요 이단자로서 분개의 대상이었으며, 일부 그의 저술은 그 격렬함으로 인해 거북스러운 존재였기에, 95년경까지만 해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회당의 개혁이 진척되고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골이 깊어지자, 그렇게 조심스러워할 이유가 없어졌다. 목회서신과 에베소서를 내놓으면서 사람들은 바울의 목소리를 들어 이야기했다.(p173~4)

바울 후예들의 집요한 활동덕에 이방인들의 사도바울은 1세기 중반 이래 주류 기독교에 의해 갇혀 있던 연옥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논쟁이 대상이었고, 그의 글은 잘못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2세기의 기독교 저자들이 바울을 참조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고, 그의 용어들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마르시온만이 바울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목회서신을 제외한 바울의 서간들을 구약을 대신할 성서의 중요한 부분으로 채택했다. 용감하게도 바울에게 진정한 자리를 찾아주려 했던 사람이 분파주의자요 이단자였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주류 교회들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p177)

12. 성숙한 기독교를 향하여

100년경, 기독교 교회와 회당을 하나로 묶어 주던 끈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끊겨져 버렸다. 물론 95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플라비우스 클렘네스라는 사람을 무신론자이며 유대풍속을 따랐다는 죄목으로 처벌하는 등 주변 인물을 탄압했는데, 이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과 기독교에 가담한 사람들을 여전히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07~8년 안디옥의 주교인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순교당했고, 112년경 비투니아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을 그 대상으로 삼았으며, 더 이상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혼동하지 않았다. 동시에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이 유대인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사건에 관해서는 이러한 박해 사건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과 사유 양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헌들을 분석할 수 밖에 없다. ...첫문서 그룹은 교회 생활들과 관련된 것들롯 도덕적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다른 다양한 작품들 ...두 번째로, 히브리서 ...그리스도론에 관한 강력한 사상을 담고 있는데 그 자체로서 독립된 연구를 요구하는 책이다. 마지막 세번째 그룹은 독창적이고 힘이 있는 신학적 사고를 포함하고 있는 요한의 저술들인데, 이들은 한 학파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유대교로부터 해방된 신학이 활짝 피어난 모습을 보여 준다. ...첫번째 그룹의 첫 텍스트'디다케' .../놀라운 사실은, 유대교에 기원을 둔 도덕적 교훈 양식을 사용한 첫 부분에 성서가 무수히 인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사유 지평에서 유대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짧은 편지인 요한2서와 3서는, 그 문체와 사고에 있어서 ...요한 1서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그 규모와 포부는 동일하지 않다. .../유대교와의 관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 외에도 우리는 이 두 글속에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들을 발견한다.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반적으로 9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서이다. ...기독교 교히가 유대 성서를 풍부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조직을 가져야 하고 전적으로 독립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주제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로마 교회가 이런 호소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삼십내지 사십년전에는 단결하여 교회를 형성할 수조차 없었던 제국 수도의 기독교인들이, 보다 항구적 조직을 향해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은 로마 권력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 시리아 안디옥의 감독 작품이다. ...그는 성육신이나 그리스도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이교도들을 맹렬하게 비난한다. 또한 이그나티우스는 집요하게 유대교와 유대교의 관습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는 "유대교"라는 용어에 맞서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저자이다. 두 종교 사이의 단절은 이제 완전한 것이 되었다. (p179~183)

상황의 요구에 따라 쓰여진 이러한 작은 문헌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서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히브리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에 관한 논문이다. ./...수수께끼 같은 측면이 있는 이 문서는 매우 독창적이다. 상당히 우아한 그리스어로 쓰였으면서도, 신약을 구성하는 책들 중 가장 구약을 즐겨 인용하고 언급하는 책 중 하나이다. ...저자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부분을 공관복음서나 바울, 또는 요한의 그리스도론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독창적 그리스도론에 관한 고찰에 할애하고 있다. .../저자에게 있어 제사 의식이나 음식물에 고나한 율법 규정은 그리스도의 사명에 관한 예시이거나 기독교인들 삶에 관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가 유대교 내부에 남아 있던 시절 바울은 일부 형제들이 율법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리는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계명의 문자적 해석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p185~187)

요한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아진 전승에 관련된 세 편의 글이 1세기말 기독교의 독립과 성숙을 보여주는 세 번째 글부의 문서를 이룬다. ...하나는 신약의 네 번째 책을 이루는 익명의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익명의 저자가 "나의 자녀 여러분"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외에는 편지글이라는 유형과 아무 관련도 없는 "편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당시 세계의 종말에 관한 매우 인상적 그림을 보여주는 계시록으로서 요한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썼다고 한다. (p188)

요한계시록은 위기와 위협의 시기에 저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통치 중 황제 숭배의 확장에 따른 위협 속에서 아시아의 교회들이 시련을 겪고 있던 시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했던 탓에" 밧모섬에 갇혀 있던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게 되고 ...일곱 교회에 그 내용을 전하게 된다. ...이 교회들은 유대교에 대해 독립한 공동체들로, 적어도 이들 중 몇몇은 주변 사회와 그 사회의 종교적 감정으로 인하여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이 텍스트에 등장하는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는 묵시록이라는 문학 장르의 법칙에 따라 의도적으로 신비스럽고 해석하기 어렵도록 되어 있다. ...분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저자가 로마에 대해 품고 있는 격렬한 적대감이다. ...종말론적인 전망은 ...새 예루살렘을 향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게 될 이 기적의 도시에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다. ...유대인들이 말세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던 점을 고려할 때, 종말적인 성취에 관한 이러한 묘사는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의 깊은 수렁을 건너뛸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p189~90)

이 서신(요한1서)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교회는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진 공동체였으며 바깥 세상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거룩한 공동체와 죄 속에 갇힌 세상 사이에 놓인 대립관계는, 동일하게 대립되는 어휘쌍들을 발견할 수 있는 쿰란에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 성격을 갖는다. .../...문제되었던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사변하기를 즐기며 조직된 기독교 공동체의 강화에 반대하는 개인주의였던 것 같다. (p192~3)

요한복음서는 성숙한 기독교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이 문서는 40년대와 50년대 팔레스타인의 기독교로 거슬러 올라가는 복잡ㅎ산 전역사를 가진 복합적인 글이다.(p193)

요한복음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예수의 대화상대자나 적대자를 지칭하기 위해 "유대인"이라는 어휘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눈에 명백하게 기독교인은 유대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대교 외부에 위치한 사람의 언어이다. ...마태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서도 얌니아 학교의 개혁가들이 회당들을 장악했다는 사실과 이 집단이 기독교의 주된 적이라는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탈유대화 징후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갖는 의미를 묻는 어려운 질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저자는 단절을 단순한 사건으로 해석하기를 피하곶 한다. 마태복음서 기자와 마찬가지로 대립 상태를 예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함으로써, 거기서 그리스도의 사명과 관계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을 보고자 한다. ...저자는 모든 "유대인들"을 나무라는 공격적인 예수를 그리고 있다. 기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존재에 대해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 올라간 다음에야 제자들에게 주는 성령의 산물에 의해서 진정한 믿음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예수의 신성은 유대인들이 그들 가운데 오신 이에게로 ㄷ로아갈 수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는 본질적 조건이다. (p196~7)

기원후 100년경,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더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회당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넓은 세상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뿌리가 유대 성서와 예수의 짧은 지상에서의 공생애에 있음을 잊지 않은 채, 새로운 상황에 고나해 숙고하려 노력했다. 그들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최종적 형태를  취해 갔다. 자기 몫의 새로운 문제들과 함께 기독교의 성숙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p201)

13. 기반 강화와 그리스화

1세기 말에 이루어진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렬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회당에 대해 의존적인 관계에 있던 가까운 과거에 대해서 아무런 미련도 느끼지 않았다. 바리새파 랍비들의 주도아래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회복하게 된 유대인들은 주변의 이방 세계에 고나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극적인 사건들이 발생함으로써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다. 기원후 115년부터 117년 사이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로마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66~70년의 경우와는 달리 기독교인들은 어느 곳에서도 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아마도 로마 당국은 이러한 일로 인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었음이 확실하다. (p203)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마저 바뀌어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된 것도 이 반란의 결과 중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항거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 더욱더 로마 제국에 대해 충성을 보였다. ...팔레스타인의 유대교가 파괴되고 바빌론의 유대교가 그 뒤를 이어받게 되면서 팔레스타인 기독교의 운명 역시 유대교를 따라 조직이 해체되고 모든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리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유대교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기독교 집단 중의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고랑이 깊어감에 딸, 기독교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로마 제국 내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로마 문명에 합류해야할 필요성을 ...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갈망은 ... 당시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자료들을 몇 개의 그룹(시리아의 도마복음서, 알렉산드리아의 두 편의 텍스트(베드로 후서와 바나바 위서), 두 편의 로마 텍스트(헤르마스의 '목자'와 제2클레멘트서)으로 분류할 수 있다.(p204)

저스틴 마터. 사르테스의 멜리톤 ...과 같은 후기의 호교론자들도 동일한 노선을 따르며 그리스 로마 사회에 존재하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오해를 씻어내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모두 교리, 도덕이나 예배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일반 여론과 로마 당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동기에서 글을 쓰고 있다.(p209)

품위있는 종교가 되고 주변 사회의 인정을 받는 다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된 열망은 아니었다. 130~150년 경 대교회들이 그리스-로마 문화 속으로 빠져들며 동화를 지향하는 것에 반대하여, 세 종류의 다른 경향들이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비온 복음서, 히브리서와 베드로의 설교로 대변되는 유대-기독교인들, 바실리드로 대표되는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마르키온의 분파들이 그들이다.(p210)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주변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이러한 세 갈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이들 세 분파는 기독교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주류 대교회 안에 감독 군주제가 일반화되고 집단지도 체제가 사라지며, 사도신경과 더불어 신학적 저술들이 보급되고, 그 최종적 범주는 고대 시기가 끝난 이후 확정되었지만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성서가 정경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촉진된 것이었다. ... 기독교는 자신의 생성 기반인 유대교로부터 해방되어 150년에는 이미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야만 하는 성년기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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